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지만,
나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.

앨범 옆에 기대어 잠든 여러 권의 일기장들은 지금껏 망각하고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을 다시 일깨워주고, 연도순으로 줄을 지어 ‘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훌륭하다’고 입을 모아 합창한다. 한때는 위인전과 동화책들이 자리 잡고 있던 그 낡은 책장에서 일기장을 꺼낼라치면, 주변의 먼지들이 ‘여태껏 그 기억들을 잘 봉인해왔다’고 내게 자랑한다.

매해 일기장을 마련하면서, 단순하고 명확한 조건을 스스로 제시했다. ‘매일매일’. 이것이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. 그럴 때면 난 매번 새로운 계약을 제안한다. ‘가끔’ 혹은 ‘어쩌다’. 그러나 얼마 못 가 그 약속 또한 허공 속에 사라져 간다.

난 이번에도 판례를 들먹거리며 일방적으로 파기된 약속에 대한 책임을 일기장에게 전가하고 책장으로 귀양을 보낸다. 일기장은 늘 그렇듯 입을 굳게 다문 채 항소하지 않는다. 결국,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승리자가 되고, 일기장은 그 책임을 수용하고 유배된 패배자가 된다.

훗날 열어본 일기장 어디서도 승리나 패배에 관한 이야기를 찾지 못한다. 다만, 그 끝을 보지 못한 일기장이 몰래 진행한 ‘나의 부재’라는 제목이 붙여진 안건의 결과만이 백지로 건네진다. 그제서야 잘못을 깨달은 나는 바보같이 부랴부랴 새로운 일기장을 준비한다.

블로그라는 새 일기장을 마련했다. 계약조건은 간단하다. ‘꾸준히’ 이제는 수많은 증인 앞에서 쉽게 책임을 떠넘기지 못하겠지.